[아이뉴스24 이균성 기자] 미국 오픈AI가 생성형 인공지능 ‘챗GPT’를 출시한 건 2022년 11월 30일이다. 정현호 삼성전자 부회장은 당시 ‘챗GPT’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나비 효과’는 기상학자 로렌즈(Lorenz, E. N.)가 만든 용어다. 정 부회장이 ‘나비 효과’를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러나 자신이 그 이론의 대상이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챗GPT는 삼성전자를 송두리째 흔들었고 그는 3년 만에 용퇴했다.
삼성전자가 세계 D램 시장에서 처음 1위를 한 것은 1992년이었다. 삼성전자는 30년 이상 이 시장에서 단 한 번도 1위를 내준 적이 없다. 삼성이 곧 메모리 반도체였고, 메모리 반도체는 한국 산업의 상징이었다. 챗GPT 이후에 그 아성(牙城)은 깨졌고, 삼성은 ‘충격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책임 논쟁이 일었고, 결과적으로, 그의 용퇴는, 그가 최종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란 뜻이 됐다.
![삼성전자 서초사옥. [사진=연합뉴스]](https://image.inews24.com/v1/f3cec1b9aa9398.jpg)
‘나비 효과’는 놀라운 발견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이해하면 안 된다. 브라질 나비 날갯짓이 뉴욕에서 발생한 태풍의 원인 가운데 하나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태풍의 모든 원인이라 단정해버리면 오류가 생긴다. 교통 체증을 보라. 체증을 뚫고 나가면 앞길이 뻥 뚫려 있는 걸 보게 되지 않던가. 요컨대 최초의 자그마한 원인이 태풍이 되려면 또 다른 수많은 요인과 결합돼야 하는 것이다.
정 부회장의 책임을 묻는 사람들의 논리는 한결같았다. 기술을 잘 모르는 그가 기술 전문가의 말을 무시하고 잘 못 된 투자 결정을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지적에도 근거가 없지 않겠지만, 100% 동의하기는 어렵다. 브라질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서 발생한 태풍의 모든 원인이라고 단정하면 오류가 될 수밖에 없듯이, 모든 책임을 정 부회장에게만 몰아가면 또 다른 문제들은 외면될 거다.
‘책임질 근거’보다 더 주목하고 싶은 대목은 ‘책임의 소재’다. 삼성전자에서 그의 공식 직함은 ‘사업지원TF장(부회장)’이었다. 재계에서는 흔히 그를 ‘삼성의 2인자’라 불렀다. 이 자리는 원래 삼성 그룹을 총괄 지휘하던 ‘미래전략실’ 실장 자리다. 미래전략실은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2017년 2월에 해체됐다. 그러나 그 역할을 완전히 없앨 순 없어 삼성전자 안에 사업지원TF를 만들었다.
TF, 그러니까 태스크 포스(Task Force)는 주지하듯 임시 조직이다. 대한민국 1위 기업인 삼성이 그룹의 핵심 컨트롤 타워를 무려 8년 동안이나 임시 조직으로 꾸려왔다. 그 불완전함의 원인은 과거에 있었지만, 그 불완전함은 그 이후 발생한 사단의 원인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의 토대 위 정점에 그가 있었다. 시절의 수상함 속에 그는 정점에 있었고, 끝내 말없이 용퇴해야 했다.
용퇴 시점은 적절했다. 모두가 그를 비판할 때는 마지막 책임으로 끝까지 버텨냈다. 그런데 무슨 곡절인지, 챗GPT가 벼락이 될 줄 몰랐던 것처럼, 미처 예상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AI 반도체 슈퍼 사이클이 도래했고, 반전의 계기가 만들어졌다. 그는 이를 용퇴의 기회로 봤다. ‘책임질 근거’를 따지면 책 여러 권으로도 모자라겠지만, 그건 다 땅에 묻고, ‘책임의 소재’만은 온전히 받아들였다.
모름지기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란 그런 것이다. 스스로 누구 못지않게 강렬한 빛을 품고 있어야 하지만, 그 빛을 안으로만 밝혀야 하는 자리다. 죽기를 각오해야만 설 수 있고, 결국 죽어야만 하는 자리이다. 그런 자리를 감당하는 게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어쩌면 그 위의 유일한 존재로 사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삼성의 2인자 자리는 그렇게 백척간두와 같다.
삼성전자는 정 부회장이 용퇴하고 사업지원TF를 사업지원실로 개편했다. 과거 미래전략실 규모는 아니지만 전략팀, 경영진단팀, 피플팀, M&A팀 등으로 진용을 짰다. 수장으론 박학규 사장이 선임됐다. 박 사장은 미래전략실, 삼성전자 DS(반도체)·DX(완제품) 경영지원실장 등 그룹 핵심 조직을 두루 거친 전략·재무통이다. 박 사장은 기술 친화적이며 과감하게 결단할 줄 아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이균성 기자(sereno@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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