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정종오 기자] 매 시즌 새로운 트렌드가 쏟아지고, 온라인 쇼핑 한 번이면 다음 날 옷이 도착하는 시대다. 이 편리함의 이면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팔리지 않은 옷은 대부분 소각되거나 매립된다.
EU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유럽에서 미판매 섬유의 4~9%가 한 번도 착용되지 못한 채 폐기되며, 이로 인한 탄소 배출은 연간 약 560만 톤에 달한다. 프랑스에서만 연간 약 6억3000만 유로 상당의 미판매 비식품 제품이 폐기되고, 독일에서는 온라인 반품 약 2000만 개가 매년 버려진다.
EU는 이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대기업의 경우, 올해 7월 19일부터 EU 역내에서 미판매 의류·신발·패션 액세서리의 폐기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EU의 지속가능 제품 에코디자인 규정(ESPR, Ecodesign for Sustainable Products Regulation)에 근거한 조치다.
![김현지 시니어컨설턴트(법무법인 화우 ESG센터). [사진=법무법인 화우]](https://image.inews24.com/v1/2fe13a919fce2b.jpg)
ESPR은 2024년 7월 18일 발효된 EU의 핵심 순환경제 규정으로 제품의 설계 단계부터 폐기까지 전 생애주기에 걸쳐 지속가능성 요건을 부과한다. 내구성, 수리가능성, 재활용 가능성, 에너지·자원 효율, 탄소발자국 등을 제품 설계에 반영하도록 요구하며, 이를 충족해야만 EU 시장에 제품을 출시할 수 있다.
올해 2월 9일에는 미판매 제품 폐기 금지에 관한 위임규정과 이행규정이 채택되면서 세부 기준이 확정되었다. 대기업은 올해 7월 19일부터, 중견기업은 2030년 7월 19일부터 미판매 의류와 신발의 폐기가 금지된다. 소기업과 영세기업은 원칙적으로 면제되나,
EU 집행위원회는 대기업이 면제 대상 업체를 통해 재고를 우회 폐기하는 사례가 확인될 경우 의무 적용 범위를 확대할 수 있는 권한을 유보하고 있다. 건강·안전상의 이유, 수리 불가능한 손상, 위조 제품 등 제한적인 예외가 인정되지만, 이 경우에도 사유별 증빙 자료를 폐기 후 5년간 보관해야 한다.
폐기 금지와는 별도로, 미판매 재고의 폐기 수량·무게·사유 등에 관한 정보를 공시할 의무도 부과된다. 대기업은 2027년 초부터 표준화된 보고 양식에 따라 홈페이지 또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통해 공시해야 하며, 중견기업에는 2030년 7월부터 동일한 의무가 적용된다.
이 방향의 규제는 프랑스가 먼저 길을 열었다. 프랑스는 2020년 세계 최초로 미판매 비식품 재고의 폐기를 금지하는 법(AGEC법)을 제정했고, 의류·신발·화장품 등에 대한 폐기 금지는 2022년 1월부터 시행되었다.
그보다 앞선 2016년에는 미판매 식품의 폐기 금지법을 도입한 바 있다. EU는 이러한 선례를 기반으로 27개 회원국 전체에 적용되는 통일 규정을 마련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2027년경에는 섬유·의류에 대한 에코디자인 위임법령이 채택될 예정이며, 제품의 전 생애주기 정보를 담은 디지털 제품 여권(DPP) 제도도 순차 도입된다.
소비자가 옷 한 벌의 원자재 출처, 탄소발자국, 수리가능성 정보를 QR코드 하나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나아가 2025년 9월 유럽의회는 폐기물기본지침(WFD) 개정안을 승인해 섬유 생산자에게 의류·신발의 수거·분류·재활용 비용을 부담시키는 확대생산자책임(EPR) 제도의 도입 근거를 마련했다.
회원국은 패스트패션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 더 높은 부담금을 부과할 수 있다. EU는 ESPR과 WFD를 양축으로, 제품의 설계부터 폐기까지 패션 산업 전반에 대한 규제의 그물을 촘촘히 조이고 있다.
이러한 규제는 한국 기업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ESPR은 EU 역내에서 판매되는 모든 제품과 그 부품·중간재에 적용되므로, EU에 의류나 신발을 수출하는 국내 기업은 물론이고 EU 수출 브랜드에 원단이나 부자재를 공급하는 협력사도 규제의 영향권에 들어온다.
K-패션의 글로벌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 이 규제에 대한 선제적 대응은 수출 경쟁력의 전제 조건이 될 수 있다. 또한 미판매 재고의 폐기 정보가 공시 의무로 전환되면서, 과잉 생산과 재고 관리 방식 자체가 ESG 평가의 핵심 지표로 부상하게 된다.
기업이 준비해야 할 과제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생산 계획과 재고 관리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미판매 재고를 폐기할 수 없다면, 생산량을 정밀하게 예측하고 과잉 생산을 줄이는 것이 비용 관리의 핵심이 된다.
둘째, 미판매 제품의 처리 경로를 다변화해야 한다. 기부, 리퍼비시, 리사이클 등 폐기 대안을 사전에 확보하고, 이를 실행할 파트너십과 물류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셋째, 2027년 도입 예정인 섬유 에코디자인 요건과 디지털 제품 여권에 선제적으로 대비해야 한다. 제품 설계 단계부터 내구성과 재활용 가능성을 반영하고, 원자재부터 완제품까지의 환경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수집·관리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패스트패션은 유행이 지났다(Fast fashion is out of fashion).”
2022년 EU 집행위원회가 지속가능 순환 섬유 전략을 발표하며 제시한 비전이다. 그 비전이 법적 현실이 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석 달이다. 빠르게 만들고 빠르게 버리는 비즈니스 모델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장에서, 지속가능성은 브랜드 이미지가 아니라 시장 접근의 법적 요건이 되었다.
김현지 시니어컨설턴트(법무법인 화우 ESG센터) khji@yoonyang.com
/정종오 기자(ikokid@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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