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정종오 기자] 지난 3월 10일 이른바 ‘노란봉투법’(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2조, 제3조)이 시행됐다. 시행 후 한 달여 동안 372개 원청 사업장을 상대로 1011개 하청 노조가 교섭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위원회가 판단한 사안들 중 대부분에서 원청의 사용자성이 인정됐다. 조선·철강·유통·금융 콜센터에 이르기까지 업종을 가리지 않고 교섭 전선이 넓어지는 모습이다.
개정법의 골자는 원청이 하청 근로자의 근로조건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하면 사용자로 본다는 것이다. 고용노동부 해석지침은 그 판단 기준을 ‘근로조건의 지배·결정에 대한 구조적 통제’로 정리했다. 원청이 하청 근로자에게 직접 일을 지시하는지가 아니라, 임금이나 근로시간 등 근로조건을 정할 때 하청 사용자의 결정을 사실상 제한하는지를 살피겠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같은 달 3월 18일, EU에서는 옴니버스 I 지침이 발효되며 기업지속가능성실사지침(CSDDD)의 최종안이 확정됐다. CSDDD는 기업이 공급망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권·환경상의 부정적 영향을 찾아내고 줄일 의무를 부과하는 EU 지침이다. 이번 개정으로 적용 대상이 직원 5000명, 매출 15억 유로 이상의 대기업으로 축소되고 시행 시기는 2029년 7월로 미뤄졌는데 핵심 의무는 그대로 살아남았다.
![조준오 변호사(법무법인 화우 ESG센터). [사진=법무법인 화우]](https://image.inews24.com/v1/6f4eaee36be3fc.jpg)
기업은 자사·자회사·직접 협력사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권 영향을 살펴야 하고, 객관적 정보로 간접 협력사에서 위험이 확인되면 점검 범위가 거기까지 넓어질 수 있다. ILO 기준에 따른 노조 결성·단체교섭 권리, 산업안전, 적정임금 등이 인권 항목에 포함되며, 위반 시 매출의 최대 3%까지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다.
여기서 국내 기업이 마주하는 딜레마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CSDDD를 충실히 따르려면 협력사의 임금 수준, 근로시간, 안전 관리, 고충처리 채널 등을 들여다보고 필요하면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모니터링과 시정 요구가 국내 노동위원회나 감독기관에서 ‘근로조건에 대한 구조적 통제’의 증거로 해석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EU 규제를 성실히 이행한 기업이 한국에서는 사용자성 인정의 단서를 스스로 제공하는 역설이 생길 수도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시행 초기 사용자성이 인정된 사례 가운데 안전관리나 근로시간에 원청의 영향이 있었다는 점이 근거로 거론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긴장 관계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독일 공급망실사법(LkSG)도 협력사의 노동권 침해에 대해 원청의 시정 의무를 정하고 있는데 공급망 인권 실사 의무와 노동법상 사용자성 문제는 별개의 트랙으로 다뤄지는 편이다.
미국에서는 2026년 2월 NLRB가 공동사용자(joint employer) 기준을 다시 좁히면서, 협력사의 근로조건에 대한 ‘실제적 통제’가 있어야 공동사용자로 본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공급망 인권 실사와 노동법상 사용자 책임의 경계를 어떻게 그을지는 글로벌 기업 모두의 공통 숙제인 셈이다.
그렇다면 국내 기업은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필자는 세 가지 방향을 제안하고 싶다.
우선, 인권 실사와 노무 관리를 절차적으로 구분하고 그 구분을 문서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CSDDD가 요구하는 실사는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의 ‘식별–예방·완화–시정·구제’ 절차에 기반한다. 협력사의 임금이나 근로시간을 원청이 직접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 영향을 함께 확인하고 협력사가 스스로 시정 계획을 세워 실행하도록 지원하는 형태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음으로, 도급 계약과 단가 산정 구조를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사용자성 판단의 주요 근거가 되는 도급비 산정, 인건비 통제, 작업 방식 지정의 흔적이 인권 실사 활동과 뒤섞이지 않도록 별도의 트랙으로 정리해두는 것이 안전하다.
마지막으로, 위험기반 실사 원칙을 적극 활용할 만하다. 옴니버스 I이 강조하는 위험기반 접근은 ‘모든 협력사에 같은 질문지를 돌리는’ 형식적 실사를 권하지 않는다. 실제 위험이 큰 지점에 자원을 집중하고, 그렇지 않은 영역은 협력사 자율에 맡기는 설계가 사용자성 리스크와 실사 의무를 함께 관리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두 규제는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결국 가리키는 방향은 비슷하다. 협력사 근로자의 권리를 존중하되, 그 책임이 누구에게 어떻게 귀속되는지를 명확히 해두라는 메시지다. 그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노무·계약·ESG·법무 부서가 한자리에 모여 공급망 실사 체계와 도급 구조를 통합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누가 무엇을 결정하고, 그 결정이 어떤 기록으로 남는지가 앞으로 국내 노동위원회와 EU 감독당국 앞에서 기업의 입장을 가르는 잣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규제 대응은 결국 설계의 문제이며, 그 설계의 정밀함이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결정짓는 또 하나의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조준오 변호사(법무법인 화우 ESG센터) jojo@hwaw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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