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김민지 기자]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4년 차를 맞았지만 국내 건설현장의 안전사고는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 최근 5년간 공식 집계된 건설현장 사망자 수만 1200명을 넘고 부상자 역시 3만명에 달한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여전히 사고 원인을 개별 작업자의 부주의나 시공사의 관리 실패로만 돌리는 접근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면 해외 주요 국가는 이미 사고 이후 처벌보다 사고를 유발하는 구조 자체를 통제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설계하고 있다. 특히 영국과 싱가포르는 발주 단계부터 공기(공사기간)와 안전 책임을 강하게 연동하고, 감리와 현장 통제 권한을 강화해 위험 요인을 사전에 차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27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GTX-A 삼성역 철근 누락 사태와 서소문 고가차도 붕괴 사고 역시 단순 현장 실수가 아니라 국내 건설산업 전반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 사건으로 봐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무리한 공기 단축 압박과 수직적 하도급 구조, 독립성을 잃은 감리 체계가 반복 사고의 핵심 원인이라는 것이다.
영국은 발주자 책임 강화…싱가포르는 즉시 작업중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곳은 영국과 싱가포르다.
![해외 주요 국가는 디지털 검측과 현장 통제 시스템을 기반으로 건설 안전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사진은 영국 CDM 제도상 발주자(Client)·주설계자(Principal Designer)·주도급자(Principal Contractor) 등 각 책임 주체(Duty Holders)의 역할과 책임 구조를 설명한 개념도. [사진=Human Focus International]](https://image.inews24.com/v1/d9517ab5b5e97a.jpg)
영국은 2015년 개정된 '건설설계관리규정(CDM·Construction Design and Management Regulations)'을 통해 발주자를 건설 안전관리의 핵심 책임 주체로 규정하고 있다. 단순히 시공사만 책임지는 구조가 아니라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예산과 공기를 결정하는 발주자에게도 안전 책임을 강하게 부여한 것이다.
영국에서는 발주자가 사업 초기 단계부터 설계·시공 과정의 위험 요소를 조율할 주설계자를 반드시 지정해야 한다. 특히 무리한 공기 단축 요구로 사고가 발생할 경우 시공사뿐 아니라 발주자 역시 형사 책임 대상이 될 수 있다.
건설안전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빨리빨리 공사'를 강요하는 구조 자체를 법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싱가포르는 더욱 강력하다. 싱가포르의 '작업장안전보건법(WSH)'은 현장에서 중대한 안전 위반이나 부실 시공 징후가 발견될 경우 즉각 '전면 작업중지 명령(SWO)'을 내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단순 시정 명령 수준이 아니라 정부가 안전성을 다시 승인하기 전까지 공사 자체를 중단시키는 방식이다. 공사 지연에 따른 비용 부담이 커지는 만큼 건설사들도 위험 요소를 사전에 통제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특히 싱가포르는 디지털 검측 데이터 제출을 의무화해 품질 관리 이력과 구조 검증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단순히 작업자 행동을 감시하는 수준이 아니라 구조 안전 자체를 데이터 기반으로 관리하는 방식에 가깝다는 평가다.
"감리가 시공사 눈치 보나"…한국 현장의 현실?
반면 국내 건설 현장에서는 여전히 구조적 한계가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논란이 된 GTX-A 삼성역 구간 철근 누락 사태 역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국가 핵심 철도망 사업임에도 설계 도면과 다르게 철근이 누락된 상태로 공사가 장기간 진행됐지만 감리와 품질 검증 체계는 이를 걸러내지 못했다.
![해외 주요 국가는 디지털 검측과 현장 통제 시스템을 기반으로 건설 안전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사진은 영국 CDM 제도상 발주자(Client)·주설계자(Principal Designer)·주도급자(Principal Contractor) 등 각 책임 주체(Duty Holders)의 역할과 책임 구조를 설명한 개념도. [사진=Human Focus International]](https://image.inews24.com/v1/a925d83f1a91f2.jpg)
업계에서는 단순 시공 실수라기보다 설계·시공·감리·품질 검증 체계 전반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결과라는 분석이 많다. 특히 감리의 독립성이 사실상 무너진 국내 구조가 핵심 문제로 지목된다.
표면적으로 감리는 발주처를 대신해 시공사를 감독하는 역할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시공사의 공기 단축 압박이나 비용 절감 요구를 외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감리업체 상당수가 대형 건설사와의 지속적인 수주 관계에 의존하고 있어 강하게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설명이다.
건설업계 한 관계자는 "현장에서는 감리가 독립적으로 공사 중단이나 재시공 요구를 하기 쉽지 않은 분위기가 존재한다"며 "공기를 늦추는 순간 비용 부담과 책임 문제가 동시에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 현장에서는 공기 압박이 안전사고의 가장 근본적 원인이라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윤종오 진보당 의원실 비서관은 "지난해 국정감사 과정에서 GTX 공사 구간을 점검했을 당시 일부 현장 근로자들이 한 달에 60공수(1공수는 일당제 개념에서의 하루) 수준으로 근무하거나 많게는 32시간 연속 작업한 사례까지 확인됐다"며 "그런 상황에서는 현장 노동자든 관리자든 정상적인 안전 점검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제도는 사고가 발생하면 시공사 처벌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실제 공기를 결정하는 핵심 권한은 발주자에게 있다"며 "결국 발주 단계부터 적정 공기와 적정 공사비를 보장하지 않으면 현장의 속도전 구조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해외 주요 국가는 디지털 검측과 현장 통제 시스템을 기반으로 건설 안전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사진은 영국 CDM 제도상 발주자(Client)·주설계자(Principal Designer)·주도급자(Principal Contractor) 등 각 책임 주체(Duty Holders)의 역할과 책임 구조를 설명한 개념도. [사진=Human Focus International]](https://image.inews24.com/v1/3a2d2de81daca8.jpg)
'건설안전특별법' 수년째 공전…"예방 인프라 구축 필요"
이 같은 문제의식 속에 국회에서는 건설안전특별법 제정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현재 윤종오 진보당 의원(울산 북구)이 대표 발의한 법안은 발주·설계·시공·감리 각 주체의 책임을 분리하고 적정 공기와 적정 공사비 보장을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발주자가 안전관리 역량을 사전에 검증하도록 하고, 적정한 기간과 비용을 제공하지 않아 사고가 발생할 경우 발주자와 설계자에게도 형사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한 점이 핵심이다.
또 시공사가 현장 상황상 공기 연장이나 비용 조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발주자에게 공식적으로 조정을 요청할 수 있는 권리도 포함됐다. 현장의 무리한 속도전을 구조적으로 완화하겠다는 취지다.
윤 의원 비서관은 "건설업계 역시 적정 공기 보장의 필요성 자체에는 상당 부분 공감하고 있다"며 "다만 징벌적 손해배상이나 책임 범위 등 일부 조항에서 현실적인 조정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제 국내 건설안전 정책도 단순 처벌 중심 접근에서 벗어나 발주 구조와 감리 독립성, 하도급 체계 개선 등 예방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 건설안전 전문가는 "AI CCTV나 스마트 안전장비 확대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며 "결국 사고를 막는 것은 현장이 위험할 때 실제로 공사를 멈출 수 있는 구조와 독립적인 감리 권한, 그리고 무리한 공기를 강요하지 않는 발주 시스템"이라고 강조했다.
발주 단계부터 적정 공기와 안전 비용을 보장하지 않는 한, 현장의 속도전과 안전 부실 논란은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김민지 기자(itismjkeem@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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