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이한얼 기자] 미국과 이란 간의 전쟁이 마침표를 찍으면서 글로벌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해소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번 전쟁의 종전 문서 공식 서명이 오는 19일로 예정되면서, 수개월간 이어졌던 중동발 물류 및 원유 공급 차질 우려도 사실상 일단락될 전망이다.
하지만 최악의 위기를 넘긴 국내 정유·석유화학 업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전쟁 기간 드러난 중동 과도 의존이라는 고질적인 구조적 취약성이 향후 해결해야 할 무거운 과제로 남았기 때문이다.

정유·석화 업계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원유와 핵심 원자재인 나프타(Naphtha) 공급망의 다변화가 생존의 필수 조건임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과거부터 꾸준히 제기돼 온 중동 편중 공급망 문제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충격을 만나면서 실물 경기 전체를 흔드는 거대한 리스크로 현실화됐기 때문이다.
국내 원유 공급망은 구조적으로 중동에 과도하게 묶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통계에 따르면 국내 중동산 원유 의존도는 약 69%에 달한다. 2021년 59.5%까지 떨어졌던 의존도가 중동 전쟁 직전 70%까지 상승했다. 특히 수입 원유의 90% 이상이 분쟁 지역인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는 점이 정유업계의 심각한 화약고로 작용했다.
더 큰 문제는 석유화학 제품의 ‘쌀’로 불리는 나프타의 공급 구조다. 국내 나프타 총수요의 약 45%를 해외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수입산 나프타의 중동 의존도는 80%를 웃돈다. 특히 자체 조달 능력이 부족해 수입산에 의존하는 중소 플라스틱·화학 제조업체들의 경우 중동 나프타 의존도가 평균 83%에 달해 대기업보다 타격이 더 컸다.
이처럼 기초 원유의 핵심 공급줄을 중동에 전적으로 맡긴 구조적 원인은 전쟁 기간 고스란히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시도로 해상 물류길이 막히자 나프타와 원유 수급에 곧바로 비상이 걸렸고, 원가가 최대 2배 가까이 폭등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특히 나프타는 인화성이 매우 높아 원유나 경유처럼 대규모로 장기간 비축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물리적 한계를 지닌다. 이 때문에 수급 불안이 발생하자마자 에틸렌 등 기초유분 생산 공장들이 감산에 들어갔고, 이는 플라스틱, 비닐, 타이어, 도료 등 생필품과 산업재 가격이 연쇄적으로 오르는 ‘도미노 물가 인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문제는 정부가 이미 수년 전부터 원유 수입선 다변화 정책을 추진해왔음에도 중동 의존도가 뚜렷하게 개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산업통상부는 원유 수입 구조의 편중을 완화하기 위해 지난 2015년부터 '원유 도입선 다변화 지원제도'를 운영하며 연간 약 1700억원 규모의 예산을 투입해왔다. 비(非)중동 지역에서 원유를 도입할 경우 발생하는 추가 운송비를 리터당 최대 16원까지 지원하는 것이 골자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해당 제도가 중동 의존도를 실질적으로 낮추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원금을 감안하더라도 중동산 원유의 가격 경쟁력이 여전히 높았기 때문이다. 업계에 따르면 비중동산 원유는 운송비와 물류비 부담이 큰 데다 공급 안정성 측면에서도 상대적으로 불리해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여기에 국내 정유사들의 정제 설비 상당수가 중동산 중질·고황 원유 처리에 최적화돼 있어 비중동산 원유 비중을 확대할 경우 추가 비용 부담과 정제 효율 저하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전문가들은 이번 전쟁이 단순한 지정학적 위기가 아니라 국내 에너지 공급망의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낸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원유 도입선 다변화 지원제도만으로는 한계가 확인된 만큼 미국 등 수입선 다변화에 필요한 실효적인 정책 지원을 비롯해 장기적으로는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 등 에너지 믹스 다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강천구 인하대 첨단제조혁신대학원 초빙교수는 "이번 이란 전쟁이 보여준 가장 큰 교훈은 단순히 원유 수입선을 바꾸는 차원을 넘어 국가 에너지 구조 자체를 다변화해야 한다는 점"이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이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를 낮추고 미국산 LNG 도입을 확대했던 것처럼 한국 역시 특정 지역에 편중된 에너지 공급망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현실적으로는 중동산 원유 비중을 단계적으로 낮추고 미국산 원유 도입을 확대하는 한편, 국내 정유시설도 다양한 유종을 처리할 수 있도록 개선할 필요가 있다"며 "궁극적으로는 전력·신재생에너지 확대 등을 통해 원유 소비 자체를 줄이는 방향으로 에너지 믹스를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한얼 기자(eol@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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