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정종오 기자] 메모리에 정보가 기록되는 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나노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KAIST 연구팀이 차세대 메모리 소재를 직접 들여다본 결과, 정보를 저장하는 작은 영역이 곳곳에서 새로 생겨나는 동시에 이미 생긴 영역도 주변으로 퍼져나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기존 이론과 달리 두 현상이 함께 일어난다는 것을 규명했다. 더 빠르고 안정적인 차세대 메모리 설계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 배충식) 신소재공학과 홍승범 교수 연구팀이 전기및전자공학부 조병진 교수 연구팀, 독일 드레스덴공대(TU Dresden) 연구팀과 공동으로 차세대 메모리 소재로 주목받는 하프늄-지르코늄 산화물(HZO)에서 정보가 기록되는 과정을 규명했다.
![KAIST 연구팀이 차세대 메모리 설계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사진=KAIST]](https://image.inews24.com/v1/2ed44693b544ce.jpg)
연구팀이 주목한 것은 ‘강유전체’다. 강유전체는 전기를 끊어도 내부의 전기적 방향을 스스로 유지할 수 있는 물질이다. 이 방향을 바꿔 0과 1의 정보를 기록할 수 있다. 이때 물질 내부에서 양전하와 음전하가 일정한 방향으로 배열되는 전기적 상태를 ‘분극’이라고 한다.
연구에 사용된 하프늄-지르코늄 산화물(HZO)은 반도체 산업에서 널리 사용하는 하프늄 산화물에 지르코늄을 섞어 강유전성을 갖게 한 소재다. 기존 반도체 제조 공정과 함께 사용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전원을 꺼도 정보가 사라지지 않는 차세대 비휘발성 메모리 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강유전체에 전압을 가하면 내부에서는 같은 방향의 분극을 가진 아주 작은 영역인 ‘도메인(domain)’이 변화한다. 도메인은 같은 전기적 방향을 바라보는 원자들이 모여 있는 작은 구역이라고 볼 수 있다. 새로운 도메인이 생겨나고 이미 만들어진 도메인이 주변으로 넓어지면서 전체 분극 방향이 바뀌고 정보가 기록된다.
그동안에는 이 과정에서 새로운 도메인이 처음 생겨나는 ‘핵생성(nucleation)’과 이미 생긴 도메인이 주변으로 퍼지는 ‘성장(growth)’ 가운데 어느 과정이 메모리 작동을 좌우하는지를 중심으로 설명해 왔다. 새로운 변화가 여기저기서 시작되는 것과 이미 시작된 변화가 주변으로 번져가는 것을 각각 중심으로 본 것이다.
HZO처럼 수많은 나노미터 크기의 작은 결정으로 이뤄진 얇은 막인 ‘하프니아계 박막’에서는 두 과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기존의 단순한 모델만으로 실제 메모리의 작동 과정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웠다.
연구팀은 고해상도 현미경을 이용해 나노미터(nm, 10억분의 1m) 크기의 도메인이 전압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직접 관찰하고 이를 실제 소자 전체에서 측정되는 전기적 변화와 비교·분석했다.
그 결과 정보가 기록되는 동안 새로운 도메인이 곳곳에서 계속 생겨나는 동시에 이미 만들어진 도메인도 주변으로 퍼져나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새로운 변화의 시작’과 ‘이미 시작된 변화의 확산’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정보가 기록되는 것이다. 연구팀은 이 과정을 하나로 설명하는 새로운 이론인 ‘동시 핵생성-성장(SNG, Simultaneous Nucleation and Growth) 모델’로 정립했다.
호수 곳곳에 돌을 계속 던지는 것과 비슷하다. 먼저 떨어진 돌에서 생긴 물결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동안 다른 곳에서도 새로운 물결이 계속 만들어진다. 여러 물결이 동시에 생겨나고 커지며 호수 전체로 퍼지는 것처럼 메모리 안에서도 새로운 도메인의 생성과 기존 도메인의 확장이 함께 진행되며 정보가 기록되는 것이다.
연구팀은 현미경으로 관찰한 나노 수준의 변화와 실제 메모리 소자의 전기적 작동을 하나의 원리로 연결했다. 이를 통해 메모리가 단순히 ‘얼마나 빨리’ 바뀌는지를 넘어, 정보 기록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떤 방식으로 퍼져나가는지까지 설명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연구는 차세대 메모리 성능을 높이는 데도 활용될 수 있다. 도메인이 만들어지고 퍼지는 과정을 이해하면 소재의 구조나 제조 공정을 조절해 정보 기록이 보다 빠르고 균일하게 일어나도록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이를 바탕으로 빠르고 안정적으로 작동하면서 전력 소비를 줄인 비휘발성 메모리와 AI용 뉴로모픽 소자 개발에도 이바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비휘발성 메모리는 전원을 꺼도 저장된 정보가 사라지지 않는 메모리이다. 뉴로모픽 소자는 인간의 뇌처럼 정보를 처리하고 기억하는 방식을 전자소자로 구현하는 기술로 저전력 AI 반도체 등에 활용될 수 있다.
홍승범 교수는 “전원을 꺼도 전기적 상태를 유지하는 강유전체에 정보가 기록될 때는 작은 변화가 곳곳에서 새로 시작되는 동시에 이미 시작된 변화도 주변으로 퍼져나간다”며 “이번 연구는 이 두 움직임이 함께 정보 기록을 완성하는 원리를 밝혀낸 것으로 더 빠르고 안정적 차세대 메모리를 설계하는 새로운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논문명: Nucleation-to-Propagation Switching Modes in Ferroelectric Hf0.5Zr0.5O2 Capacitors)는 KAIST 신소재공학과 부얀톡톡 밭조릭(Buyantogtokh Batzorig) 박사후연구원이 제1저자로 참여했다. 국제 학술지 ‘나노 레터스(Nano Letters)’에 지난 6월 15일자로 실렸고 표지논문으로 선정됐다.
/정종오 기자(ikokid@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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