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정종오 기자]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언제부터인가 계약서가 두꺼워졌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배우 섭외 계약서에 ‘3D 스캐닝 데이터 이용범위’ 조항이 생겼다. 제작 발표 자리에서 투자사 실사팀이 ‘AI 학습데이터 출처를 증빙할 수 있느냐’고 묻는 일도 낯설지 않다.
이 변화의 배경에는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빠르게 부상하는 하나의 기준이 있다. ‘디지털 클린 에셋(Digital Clean Asset)’이라 부를 수 있는 기준이다. AI 학습에 쓰인 데이터가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았는가, 배우의 신체 데이터를 동의 범위 안에서만 사용했는가. 두 질문에 모두 답할 수 있어야 실사를 통과한 자산으로 인정받는다. 두 위협은 성격도 터지는 시점도 다르다. 그럼에도 현장에서는 이 둘을 하나로 뭉뚱그린다.
AI 배경 합성툴로 세트를 만들고, 생성형 AI로 대본을 다듬고, AI 음악툴로 OST를 뽑는 일이 제작현장의 일상이 됐다. 학습데이터의 출처가 불분명한 AI가 만들어낸 결과물은 언제든 저작권 침해소송의 표적이 될 수 있다. 게티이미지가 이미지생성 AI 기업을, 뉴욕타임스가 오픈AI를 상대로 낸 소송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정한근 법무법인 화우 고문. [사진=법무법인 화우]](https://image.inews24.com/v1/3925f2422daac8.jpg)
또 다른 사건에서 미국의 한 연방법원은, 합법적으로 취득한 데이터로 학습한 것은 공정이용이지만 해적판 사이트에서 700만권을 긁어와 쌓아 둔 행위는 별개라고 봤다. 학습행위 자체가 아니라 데이터를 어디서 가져왔느냐가 침해를 가른다는 판단이다.
이 소송의 당사자였던 앤트로픽은 2025년 9월 약 2조원(15억 달러) 규모의 합의에 동의했고, 이는 미국 저작권소송 사상 최대 규모로 기록됐다. 클린 데이터는 이제 도덕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출처를 대지 못하는 프로젝트는 투자 검토단계에서 먼저 걸러진다.
그래서 관건은 그 출처를 증명할 수 있는 상태다. 라이선스가 확보된 학습 셋으로 간다는 방향은 되돌릴 수 없다. 대형 제작사는 자체 계약과 법무로 그 증거를 쌓고, 중소 제작사와 독립 창작자는 어떤 툴로 무엇을 만들었는지 기록해 두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학습데이터가 어디서 왔는가가 첫 번째 전선이라면, 두 번째 전선은 더 가까운 촬영 현장에서 열린다. 배우가 촬영 전 3D 스캔에 동의했다. 그런데 완성본 예고편에는 자신이 연기하지 않은 장면이 담겨 있었다. 복제된 신체가 후반 작업에서 조용히 동원된 것이다. 이런 ‘디지털 리플리카(Digital Replica)’는 스캔으로 만든 것뿐 아니라 AI가 학습해 만들어 낸 얼굴·목소리까지 포함한다. 2023년 할리우드 배우 파업의 주요 쟁점 중 하나가 바로 이 사용범위였다. 그 결과 미국배우조합 SAG-AFTRA는 디지털 복제본을 만들거나 쓰려면 표준 약관에 끼워 넣지 말고 ‘명확하고 눈에 띄는’ 형태로 본인 동의를 따로 받아 용도를 특정하도록 하는 조항을 단체협약에 담아냈다.
이것은 계약 위반이기 이전에 법적 권리의 침해다. 우리 법원은 광고모델 사진을 계약에 없던 매체에 게재한 사건에서, 촬영에 동의했더라도 예상 범위를 벗어난 이용에는 별도 동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실무에서는 이 범위를 지켰다는 사실을 결국 사용한 쪽이 소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저작권법 역시 실연자에게 실연이 무단변형되지 않을 동일성유지권을 부여하며, 이는 일신에 전속하는 인격권으로 양도·포기의 대상이 아니다. 배우의 디지털 신체는 법적으로 그 배우의 것이다. 스캔 데이터의 생성·보관·수정·재이용 범위를 항목별로 명시하고 편집물에 대한 사전 검토권을 보장하는 것, 그것이 출발점이다.
학습데이터 오염은 ‘무엇을 썼느냐’의 문제고, 디지털신체 무단전용은 ‘누구에게 허락받았느냐’의 문제다. 첫 번째 리스크는 AI 툴을 고르는 순간 이미 잉태되고, 두 번째 리스크는 편집실에서, 혹은 배포 이후에 불거진다. 하나의 체크리스트로 두 문제를 함께 점검하면 둘 다 놓친다.
디지털 클린 에셋은 하나의 도장이 아니라 두 개의 서명이다. 글로벌 자본은 이미 이 둘을 따로 묻기 시작했다. 그 질문에 각각 답할 언어를 갖추는 것, 그것이 콘텐츠가 신뢰받는 자산으로 거래되기 위한 첫걸음이다.
정한근 고문(법무법인 화우) hkjung@yoon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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