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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트럼프가 촉발한 현대판 장정(長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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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뉴스24 박지은 기자] 미국이 그나마 중국이 살 수 있었던 저사양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출마저 제한했다.

엔비디아에 이어 인텔까지 중국으로 AI 반도체를 수출하려면 사전 승인을 받도록 한 것이다. 미국은 이미 고사양 AI 반도체의 중국 수출을 제한해왔는데, 이제 저사양 제품까지 그 범위가 넓어졌다.

엔비디아는 고(高)사양 AI 반도체 수출이 막히자, 일부러 사양을 낮춘 H20을 중국에 판매해왔다. 하지만 중국 스타트업 딥시크가 저사양 AI 칩을 갖고 고성능 AI 모델을 구현하자 미국이 더욱 강력한 제재 조치를 내놓은 것으로 풀이된다.

중국의 반응은 심상치 않다. '트럼프 2기' 출범 후 쏟아진 '관세 폭격'에 대해 린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은) 싸우고 싶지 않지만,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고 응수했다.

중국 정부는 최근 공식 발표문을 통해 "앞으로 미국이 관세를 아무리 높게 인상하더라도 이로 인한 경제적인 의미는 없다"며 "미국이 관세로 숫자 놀음을 계속한다고 해도 이제 무시할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트럼프 1기' 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중국은 2016~2019년에도 관세 문제가 불거지자 미국산 대두(콩) 등을 대량 수입하는 등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다. 양국 관계가 화해 무드에 접어들자 세계 경제도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까지 훈풍 모드였다.

지금 중국은 '버티기 모드'다. 미국이 대(對)중국 관세를 최대 245%까지 부과할 수 있다고 예고하고, 저사양 AI 칩 수출까지 제한해도 "중국을 존중하라"며 요지부동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도 미국으로부터 고율의 관세를 부과 받은 동남아시아 국가 순방에 나섰다.

문득 중국이 트럼프 1기부터 시작된 무역·기술 규제를 현대판 장정(長程)으로 여겼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트럼프 1기였던 2019년 5월 미국은 중국에 대한 관세율을 15%에서 20%로 인상했다. 같은 달 시 주석은 장시성을 찾아 "새로운 장정에 나서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중국공산당이 1934~1935년 기존 근거지였던 장시성을 떠나 약 1년 간 9000㎞를 이동해 산시성 옌안으로 이동한 처절한 과정을 중국에선 장정이라고 부르는데, 시 주석이 미국의 무역·기술 규제에 대한 대응을 여기에 빗댄 것이다.

실제로 중국은 2016년 이후 미국의 견제가 시작되자 자체 기술 생태계 육성에 속도를 냈다. 미국과 유럽의 설계도를 갖고 생산만 하던 '공장'에서 벗어나 첨단 기술 주도권에 도전했다.

대표적인 예가 반도체다. 수십조원대 정책 자금을 쏟아부어 반도체 기업들을 육성했고 결국 D램은 CXMT, 낸드는 YMTC, 파운드리는 SMIC가 급성장했다.

중국에서 우후죽순 세워졌던 반도체 기업들은 최근 3~4년 새 기술력에 따라 솎아지는 과정을 겪었다. 장정 기간 중국공산당 군대의 80%가 사망하고 최종 정예병만 남은 과정과 비슷하다.

중국 내에서 반도체 설계, 생산, 후공정까지 마칠 수 있는 기술 생태계는 최근 첨단 장비 분야까지 확장되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선 가까운 시일에 중국산 장비로 5~7나노미터(㎚) 공정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두 고래가 화해 없이 싸우다 각자의 기술 생태계와 시장으로 분리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트럼프 1기 땐 미국의 강한 압박에 중국이 어느 정도 고개를 숙이며 갈등 국면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장정을 곱씹으며 준비한 중국이 이번엔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는다면, 두 국가 모두 중요한 교역국인 우리의 부담이 가중될 게 뻔하다.

물론 양국 정상이 극적으로 만나 공존의 묘안을 찾을 수도 있다. 반대로 최악의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용 D램, 중국용 D램을 따로 만들어 판매하거나 한쪽 시장을 포기해야 할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트럼프의 총공세에도 버티는 중국을 보며 이 싸움이 어떤 결론을 가져올 지, 혹시 세계 질서의 변곡점이 바로 지금은 아닌지 불안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박지은 기자(qqji0516@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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