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뉴스



"700억이 장난인가요"⋯정릉골의 '신음' [현장]


명품 타운하우스 꿈꾼 성북구 '마지막 달동네' 재개발 파행
설계변경 갈등에 자금 문제까지⋯구청·시공사 "나 몰라라"

[아이뉴스24 김민지 기자] "이게 단순히 내부 갈등 문제겠어요? 700억원이라는 돈이 총회도 안 거치고 왔다 갔다 했다는데, 어느 누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건 재개발의 기본 상식이 무너진 겁니다." (정릉골 인근 공인중개사 A씨)

철거를 앞둔 서울 성북구 정릉골 재개발 현장에는 지금 굴착기 같은 중장비 대신 '분담금 폭탄 반대'라고 적힌 붉은 현수막을 볼 수 있다. 2024년 1월 관리처분인가를 받고 이주가 마무리 단계까지 접어들었으나 사업이 중단되며 정적이 흐르는 현장이다. 조합에 따르면 이주율은 90%를 넘겼다.

재개발을 완료하고 타운하우스 입주가 예정된 시기가 올해라는데, 사실상 기약이 없다. 공사가 멈춘 자리에 남은 건 공터와 잡초, 그리고 조합원들 사이의 불신이다.

이주율 90%로 철거를 앞둔 서울 성북구 정릉골 재개발 현장에 쓰레기가 잔뜩 쌓여있다. [사진=김민지 기자]
이주율 90%로 철거를 앞둔 서울 성북구 정릉골 재개발 현장에 쓰레기가 잔뜩 쌓여있다. [사진=김민지 기자]

1970년대의 정취를 간직한 달동네이자, 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 작가의 집필 공간을 품고 있던 정릉골. 당초 용적률 99.89%를 적용해 지상 4층 81개 동, 1417가구 규모의 저층 테라스하우스를 짓기로 한 바 있다. 하지만 일부 조합원이 '사업성 개선'을 이유로 15층 아파트 전환을 요구하면서 갈등이 본격화됐다. 그렇게 하면 약 500가구가 늘어나 분담금을 낮출 수 있다는 솔깃한 얘기였다.

일각의 이런 주장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문제는 '시간이 곧 돈'이라는 점이다. 이주가 시작된 뒤에는 사업비와 이주비 대출 이자가 매달 발생한다.

임동하 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장은 최근 "지난 1년간 조합 집행부 기능이 사실상 마비되며 약 120억원의 손실이 누적됐다"고 밝혔다. 이는 조합장 해임을 둘러싼 내부 갈등과 법적 공방이 반복되면서 집행부 공백 사태가 이어진 데 따른 것이다.

임 조합장은 2025년 1월 23일 보궐선거로 조합장에 당선됐으나 2025년 2월 7일 선관위가 돌연 당선무효를 선언했다. 이로 인해 약 7개월간 직무를 수행하지 못했으며, 이후 서울북부지방법원이 해임 및 직무집행정지 결의에 절차상 하자가 있다며 세 차례 효력정지 가처분을 인용하면서 복귀와 직무정지가 반복됐다.

조합에 따르면 올해 1월 22일 법원 결정으로 다시 업무에 공식 복귀했지만, 양측의 소송전이 이어지면서 갈등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은 상태다.

이주율 90%로 철거를 앞둔 서울 성북구 정릉골 재개발 현장에 쓰레기가 잔뜩 쌓여있다. [사진=김민지 기자]
소설 '토지','김약국의 딸들' 등을 쓴 박경리 작가가 거주했던 정릉가옥터 인근 골목. [사진=김민지 기자]

'주인 없는 안방?'…빼앗긴 절차, 사라진 '700억'의 행방

가구수를 늘리자는 주장으로 삐걱인 사업은 전임 천 모 조합장 재임 시절 '700억원 보증금 실종 사건'까지 가세하며 불에 기름을 부은 격으로 조합 내부를 들쑤셨다. 사업추진을 예상대로 진행해도 모자랄 판국에 두 가지 초대형 이슈에 대한 원인파악과 진상규명 목소리에 파묻혀 조합 기능이 마비되며 하릴없이 지연되게 된 것이다.

보증금 이슈는 조합이 시공사 포스코이앤씨를 선정할 당시 총회를 통해 계약보증금 700억원을 준공 후 반환하기로 의결했으나, 총회 승인 없이 이사회와 대의원회만의 결의로 시공사와 변경계약을 진행했다는 의혹이다. 변경 내용에는 △직접대여금 700억원 반환 시점 조정 △금융비용 부담 주체 변경 등이 포함됐다고 한다.

상세 계약변경 내용을 보면, 보증금 반환 시점이 '준공 후'에서 '착공 전'으로 앞당겨졌고 금융기관 차입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자 부담도 기존 시공사 부담 구조에서 사실상 조합이 부담하는 구조로 전환됐다.

법원 결정문에서도 이런 변경내용은 언급된다. 서울북부지방법원은 신임 임 모 조합장 당선무효 효력정지 가처분 사건에서 "총회에서 준공 후 반환하기로 결의했으나 이후 협의 과정에서 착공 전 반환으로 변경됐다"고 적시했다. 반환 시점이 바뀌었고, 그 문제가 분쟁의 핵심이라는 점이 확인된 셈이다.

재개발 사업은 조합원 자금과 대출에 의존해 진행된다. 반환 시점과 이자 부담 주체가 달라지면 조합 재무 구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이 과정에서 약 20억원의 금융비용이 발생했고, 해당 비용은 조합이 부담하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주인 모르게 돈이 움직이고 이자만 늘었다"는 조합원 불만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로 인해 현재 조합이 매달 10억원 규모의 이자를 내고 있다는 얘기들이 나온다. 신규 차입이 막힌 이후에는 기존 대출 잔액을 이자 납부에 활용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자 납부가 중단되면 연체이자가 붙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추가적인 법적 절차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이주비 대출이 연체될 경우 400여 명의 조합원이 개별 연체자로 전환될 수 있어 2차 피해 우려도 제기된다.

이주율 90%로 철거를 앞둔 서울 성북구 정릉골 재개발 현장에 쓰레기가 잔뜩 쌓여있다. [사진=김민지 기자]
성북구 정릉골 내 이주를 마치고 오랜 시간이 지나 무너진 집들 뒤로 아파트들 전경이 보이고 있다. [사진=김민지 기자]

막대한 자금 부담이 수반되는 해당 사안이 어떻게 해서 변경이 추진됐으며, 어떤 적법한 과정을 거쳐 승인이 됐는지 여부는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이렇다 보니 성북구청이 '조합 자율'이라는 명분 아래 관리감독을 방치하고 있다는 비판이나 대형 건설사인 시공사가 조합원 전체에 영향을 줄 계약구조 변경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등의 주장이 산발적으로 제기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김인만 부동산경제연구소 소장은 "재개발 사업은 조합원 분담금과 금융 조달 구조가 맞물려 돌아가는 구조"라며 "보증금 반환 시점이나 금융비용 부담 주체가 바뀌면 사업비 총액과 자금 흐름이 달라질 수 있고, 이는 결국 조합원 개별 부담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계약 변경은 조합원 재산권과 직결될 수 있는 사안인 만큼 절차적 정당성과 정보 공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해석으로 풀이된다.

정릉골 현장에는 아직 굴착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현수막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사업의 방향을 둘러싼 논쟁은 대규모 타운하우스라는 '집의 형태'에서 시작됐지만, 지금은 돈의 흐름과 책임의 문제로 옮겨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자는 쌓이고, 이주민들과 조합원들의 불안도 함께 커지고 있다.

현장의 분위기는 냉랭하다. 정릉동에서 15년째 영업 중인 공인중개사 A씨는 "입주 예정시기로 보면 지금쯤 프리미엄이나 입주 문의가 쏟아져야 하는데 지금은 전화조차 없다"며 "설계를 다시 밟으면 5년, 길면 10년까지도 더 걸릴 수 있다는 얘기가 돌면서 시장이 얼어붙었다"고 말했다.

인근 중개업소 대표 B씨도 "이미 관리처분인가까지 난 사업의 설계를 전면 수정하면 서울시 심의와 환경영향평가 재이행 등 각종 인허가를 다시 받아야 한다"며 "공사비와 금융비용이 오르면 분담금이 줄기는 커녕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민지 기자(itismjkeem@inews24.com)




주요뉴스



alert

댓글 쓰기 제목 "700억이 장난인가요"⋯정릉골의 '신음' [현장]

댓글-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로딩중

뉴스톡톡 인기 댓글을 확인해보세요.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