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주 많은 지역에 시간당 50mm 내외의 비가 내렸습니다. 이런 비가 하루 종일 계속된다면 1년치 강수량에 해당합니다. 기후변화로 홍수와 가뭄이 불규칙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일상이 되면서 '뉴 노멀'(새로운 기준)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재해 대비 시설을 만드는 데에는 많은 준비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선 현재 쓰고 있는 설계 기준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기상학자들이 연간 강우량의 새로운 기준을 확정해 주어야 토목 엔지니어들이 하수도관의 크기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설계 강우량은 지난 수십년 동안의 실적 자료로 결정하는데, 갑작스런 기후 변화 때문에 새로운 기준을 세우기가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지금 직경 300mm 하수관이 넘쳐난다고 해서 무턱대고 600mm로 설계하지는 않습니다. 기술적으로는 가능하나, 경제적으로는 과투자이기 때문에 적절치 않다는 것이 공학적 판단입니다.
언론은 재해가 나면 ‘할 수 있는데 안 했다’로 몰고 가고, 대통령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대처하겠다’지만, 정작 재해 일선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마음에 부담만 줄 뿐, 자칫 엉뚱한 희생양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재해의 원인을 서둘러 발표하는 것은 민심 수습에 도움이 될지 몰라도, 실무적으로는 오히려 혼란만 일으킬 수 있으므로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특히 재해의 책임 소재를 밝히는데 우선을 두면 재해 관리자는 현장 일보다 서류 챙기기에 집중하게 됩니다.
옛날에는 비가 안 오면 왕이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기우제를 지낸다고 비가 올 리 없습니다. 기우제는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는 왕의 자애로운 정치 행위였습니다. 그런 문화적 배경 때문인지 정치인들과 언론들은 재해를 정치 이슈화해서 민심을 흔듭니다. 재해가 나면 언론이 제일 먼저 쓰는 제목은 ‘인재’입니다. 야당은 그 언론에 근거해 정부를 공격합니다. 이게 반복되는 사이에 재해의 원인과 대책은 산으로 올라갑니다.
건설회사에는 안전을 총괄하는 보직이 있습니다. 이 자리는 사실 임원들이 좋아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좋은 실적을 내기 어려워 성과급 받기도 어렵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경험이 있기에 실무에 도움이 될 의견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재해 책임에 대하여 하나의 기준을 세웠습니다. 즉 현장의 재해는 당해 현장 소장의 책임이고, 회사 전체의 연간 재해율이 높으면 본사의 책임으로 판단했습니다. 회사 전체의 재해율이 높다는 것은, 번듯한 안전경영체계를 만들어 놓고도 형식적으로 문서만 맞추어 놓는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기준으로 중대재해처벌법을 보면, 기대만큼 효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재해를 일으키면 처벌하는 것은 당연하나, 회사의 최고 경영자를 특정 재해의 책임자로 처벌하는 것은 이 법의 목적이 재해 방지보다는 민심 수습에 맞추어져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 법이 생긴 후 변호사들의 일감이 많이 늘었다고 합니다.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는 "중대 재해 반복은 지배 구조부터 시작해 다층적 요소들이 작동한 것"이라며 "산업을 지배하는 여러 가지 지배 구조를 통합적으로 봐야 발본색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합니다. 이분은 재해의 근본 원인을 지배 구조에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지배 구조'란 말을 정확히 헤아리기 어려우나, 기업 경영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에서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과장된 말투에 잘 공감합니다. 그러나 국가 지도층이라면 용어의 선택에 신중해야 합니다. 국회에 자주 내걸리는 '결사반대' 현수막 대로 실행했다면 많은 국회의원들이 저 세상으로 갔을 겁니다. '발본색원'이란 ‘뿌리를 뽑아 원천을 막아버린다’는 뜻인데, 결과는 원치 않는 쪽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알곡을 축내는 참새를 없애려다 메뚜기 떼에게 더 많은 알곡을 뺏긴 마오쩌뚱의 실수로 수많은 인민이 굶어 죽었습니다.
'안 하는 것이니 혼내야 정신차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할 방법이 없거나, 합목적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으로 안 한다고 보는 것은 편향된 주관이기 쉽습니다. 극대화와 최적화의 차이를 안다면 '안 한다'는 판단은 신중해야 합니다.
올림픽의 모토가 127년만에 바뀌었습니다. '빨리, 높이, 힘차게'에 '다 함께(together)'가 추가되었습니다. 공학의 모토도 '좋게, 빠르게, 싸게'에 '안전하게(safer)'가 추가됐습니다. 시대 정신은 늘 바뀝니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의사결정의 기준이 극대화에서 최적화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안전을 극대화하자고 주장하나, 무재해는 다른 요소들의 희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 중에도 경제적 타격이 제일 큽니다. 더 큰 문제는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키우는 것입니다. 방법이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차이는 사회적 합의에 달렸고, 그걸 옳은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이 국가 지도층이 할 일입니다.
관청을 뜻하는 청(廳)이라는 글자를 뜯어보면, '윗분이 말씀하는 곳'이 아니라 '백성들의 말을 듣는 곳'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국가 지도층이라면 자기 이상도 중요하지만, 현실과의 균형도 중요하다는 것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세 아들이 전사한 집안의 막내를 찾아 구해오라는 명령에 따라 막내를 살리고 지휘관 등은 전사합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국가의 명령이라는 두 개의 가치에 대하여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히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지를 묻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문명은 '확률 곱하기 기댓값'의 결과물입니다. 확률이 과학적이라면, 기댓값, 즉 '가치'는 철학적입니다. 확률은 객관적이지만, 기댓값은 주관적입니다. 객관과 주관이 균형을 이루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외부 정보의 90%는 눈과 귀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심장은 하나인데, 눈과 귀는 왼쪽과 오른쪽에 하나씩 있습니다. 균형 잡힌 생각으로 삶을 살라는 것이 자연의 섭리가 아닐까 합니다.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